예수꼐서 왜 총리 요셉이 아닌 유다의 후손으로 오셨을까?
어느 독자께서 “창세기의 결론이 요셉으로 마치는데 왜 예수께서 총리 요셉을 통해서 오시지 않았을까? 그가 이방 여인과 결혼했기 때문인가요?”라는 질문을 해주셨다. 필자도 젊었을 때 같은 질문을 해본 적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분명 요셉의 후손이 아니요 유다의 후손을 통해 오셨다(마1:2,3). 요셉이 애굽 이방여인과 결혼했기 때문에 예수께서 그 후손을 통해 오시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유다 역시 가나안 사람 수아의 딸(밧수아)을 아내로 가졌으니(창38:2, 대상2:3), 유다의 아내도 이방여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럼 예수 그리스도는 왜 유다의 후손을 통해서 오셨을까?
먼저 창세기 전체 내용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4가지의 중대사건 (1-11장)
1) 창조 (1-2장)
2) 타락 (3-4장)
3) 홍수 (5-9장)
4) 바벨탑 (10-11장)
2. 4분의 위대한 믿음의 족장 (12-50장)
1) 아브라함 (12-23장)
2) 이삭 (24-26장)
3) 야곱 (27-36장)
4) 요셉 (37-50장) — (38장만 유다와 다말의 사건을 기록함)
요셉의 이야기는 창세기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럼 요셉의 삶을 생각해 보자.
요셉은 아버지 야곱으로부터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 때문에 형들의 미움을 받게 되어 애굽의 노예로 팔리게 되었다. 그럼에도 요셉은 신앙으로 모든 것을 인내해 애굽의 총리가 되었고 흉년이 들어 기아에 허덕이던 자기 형제들과 아버지를 초청해 윤택한 삶을 누리도록 배려했다. 형들에 대한 분노나 원한을 갖지 않고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의 섭리와 뜻으로 받아들이고 사랑으로 돌보아 주었던 자이다. 야곱의 12 아들 중에서 가장 온전하며 신실한 믿음의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창세기에서 예수의 성품을 가장 닮은 자가 바로 요셉이다. 요셉은 그리스도의 예표가 된다고 불 수 있으며 그 후손을 통해 그리스도가 오심을 기대해 볼 수 있다.
다음으로 유다를 생각해 보자.
유다의 기사는 창세기 38장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유다의 생각과 말과 행동들이 창37-50장의 요셉의 사건 내용 중에 포함되어 있다.
1. 유다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매사에 좋은 의도로 생각하고 제안해 일하는 자였다.
유다는 야곱의 첫째 아내인 레아를 통해 낳은 넷째 아들이며, 그 이름의 뜻은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창29:35)이다.
아버지 야곱이 요셉에게 심부름 시켜 들에서 양치는 형들을 찾아가게 했다. 그러나 그 형들은 요셉이 오는 것을 보고 그를 죽이려고 모의했다. 주동자는 둘째 시므온이었고(창42:24), 셋째 레위 역시 동조했다(창34:25, 49:6-7). 그러나 맏형 르우벤은 그는 죽이지는 말고 광야 구덩이에 넣으라(창37:21)고 명했다. 요셉은 구덩이에 빠져 형들에게 살려달라고 애걸하며 외치는 상황에 놓치게 됐다. 이 때 동생 요셉을 살려야 한다는 생각으로 가득 찬 유다는 애굽으로 향해 지나가던 행상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자는 제안을 하게 되었고 요셉은 애굽에 팔리게 되었다. 형들은 집에 돌아와 아버지 야곱에게 동생 요셉이 짐승에 잡아먹혔다고 거짓말했다. 아들 요셉이 정말 죽은 줄 알았던 야곱은 대성통곡하며 슬퍼했다. 그리고 요셉은 애굽의 바로의 신하 시위 대장 보디발에게 팔리게 되었다.
곧 이어 창세기 38장에는 유다의 이야기로 이어가게 된다. “그 후에 유다가 자기 형제에게서 내려가서(떠나가서) 아둘람 사람 히라에게로 나아가니라. 유다가 거기서 가나안 사람 수아라 하는 자의 딸을 보고 그를 취하여 동침하니(1-2절)” 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본문만 보면 유다의 잘못된 점들만 보이게 된다. 첫째는 그가 형제들을 떠났다는 것이며 둘째는 그가 이방 여인을 보고 동침했다는 사실이다(참고:창6:2). 그러나 여기서 왜 유다가 형제들을 떠나야만 했던 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유다는 형제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했을 것이며 아버지 야곱에게 슬픔의 고통을 안겨준 장본인이라는 깊은 죄책감에 빠졌던 것이다. 왜냐면 형제들이 요셉을 죽이자고 모의했던 것과 구덩이에 던지자고 했던 것들은 다 자취를 감추어 버리고 유다의 제안이었던 애굽에 팔자는 제안만이 결과로 남아있었기 때문이다.(참고:확바#11, 도마의 사건).
2. 유다는 회개할 줄 아는 겸손한 자였으며. 같은 잘못을 다시 범치 않는 자였다.
창세기 38장의 중요 내용은 유다가 여행을 가게 되었고 창녀와 관계를 하게 됐다. 그 후 자기의 며느리 다말이 임신했다는 소식을 들은 유다는 그녀를 임신케 한 사람이 자기임을 알고 “그(며느리 다말)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라 하고 다시는 그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더라(창38:26)” 라고 말한다. 유다는 자신의 잘못을 솔직히 말하면서 회개하는 정직하고 겸손한 모습을 보여 준다. 또한 다시는 같은 죄를 범치 않겠다는 결단과 이를 실천해 나갔던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준다. (참고: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하고 그 남편 우리야를 전쟁터에서 죽이게 하는 것과 비교)
예수께서 성경에 나타난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욥, 요셉, 여호수아, 사무엘, 다니엘)을 통해 오시지 않으시고, 왜 죄와 허물 많은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 다윗을 통해 오셨을까? 그 답은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막2:17)”,.“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롬5:20)”, “그런즉 –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롬6:1-2)”라는 말씀에 있다. 큰 죄를 범한 괴수라 할지라도 담대함과 용기를 가지고 믿음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던 것이다.
▲요셉과의 만남을 기뻐하는 형제들 |
3. 그후 유다는 형제(남)를 위하여 자신을 담보로 내 놓았던 자이다.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기를 작정한 유다는 자신을 위해서라기보다 형제와 공동체를 위해 헌신하며 살아간 사람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이며 그리스도의 삶을 닮아가는 자의 삶이었다.
야곱의 열 아들이 흉년이 들어 양식을 구하려 애굽에 처음 내려갔을 때 요셉은 친 동생인 베냐민을 데려오게 하기 위해 시므온을 담보로 삼아 옥에 가두고 다른 형제들은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그 후 아들들은 베냐민을 꼭 데려가야 한다고 요청하지만 야곱은 이를 거절한다. 이 때 “유다가 아비 이스라엘에게 이르되 저 아이(베냐민)를 나와 함께 보내시면 우리가 곧 가리니 그러면 우리와 아버지와 우리 어린 것들이 다 살고 죽지 아니하리이다. 내가 그의 몸을 담보 하오리니 아버지께서 내 손에 그를 물으소서 내가 만일 그를 아버지께 데려다가 아버지 앞에 두지 아니하면 내가 영원히 죄를 지리이다.(창43:8-9)”라고 말한다.
이 말을 들은 야곱은 베냐민과 함께 자녀들을 애굽으로 보낸다. 이들이 양식을 얻어 다시 돌아가게 될 때, 요셉은 베냐민과 함께 지내기 위해 베냐민의 자루에 자기의 촛대를 숨겨 넣어 다시 잡혀오게 만든다. 이 때 유다는 총리 요셉에게 “청컨대 주의 종으로 아이를 대신하여 있어서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아이는 형제와 함께 도로 올려 보내소서. 내가 어찌 아이와 함께하지 아니하고 내 아비에게로 올라갈 수 있으리이까 두렵건대 재해가 내 아비에게 미침을 보리이까(창44:33-34)” 라고 요청한다.
곧 요셉은 감동을 받고 자신을 형들에게 알린다.(창45:1). 분명 유다는 형제(남)를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하는 정신으로 살아간다. 즉 남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죽음을 선택하려는 위대한 헌신의 사람으로 변한다. 이로써 유다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그의 몸을 담보하여 십자가에 죽으심을 예표해 준다. 이는 죄범하기 쉽고 죄범한 우리에게 더 큰 위로와 소망과 용기와 결단을 가져오게 하며 거룩한 삶으로 승화시켜 가는데 더 큰 힘이 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야곱이 창세기 49장에 임종을 앞두고 12자녀에게 장차 될 일을 예언하는 내용을 살펴보자.
창세기 49장에는 야곱이 생의 마지막을 앞에 두며 12자녀들을 불러 예언해 준다. 이 중에서 시므온과 레위에게는 “그들의 칼은 잔해하는 기계로다. 네 혼아 그들의 모의에 참예하지 말찌어라 (5-6절)”고 경고한다. 그러나 요셉에게는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22절)”라 말씀하므로 요셉의 무성한 가지가 담을 넘어 이웃 형제에게 유익이 된다는 말씀이며, “요셉의 활이 도리어 견강하며 그의 팔이 힘이 있으니 야곱의 전능자의 손을 힘 입음이라. 그로부터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가 나도다(24b절)”라고 말씀해준다.
여기서 성경학자들에 따라 ‘이스라엘의 반석’이 누구인가에 대하 견해가 각각 다르다. 어떤 이들은 요셉 자신이라고 말하기도 하며 또 다른 이들은 그로부터 목자가 나도다 라고 했으니 요셉의 후손들로 목자의 역할을 한 여호수아, 드보라 사무엘, 기드온, 입다 등을 말한다고 주장한다. 또 다른 이들은 선한 목자(The Shepherd)를 예수 그리스도로 보며, 요셉을 통해 그리스도를 예표로 말해준다고 주장한다.
우리말 성경에는 예수가 요셉의 후손으로 오시는 것처럼 되어 있지만 영어 성경들 KJV, NIV, RSV에는 “요셉의 활이 도리어 견강하며 그의 팔이 힘이 있으니 야곱의 전능자의 손 즉 이스라엘의 반석의 힘을 입음이니다”라고 되어 있다. 요셉의 후손으로 예수가 오심을 말하는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의 목자이신 그리스도의 힘으로 요셉이 능한 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유다에 대해서는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찌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비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창49:8)”, ”홀(왕의 지팡이)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예수)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창49:10).라고 유다의 후손을 통해 예수가 오심을 말해주고 있다. 물론 요셉은 그의 삶에서 예수의 모형으로 볼 수 있으나, 죄범한 가운데 즉시로 회개하며 결단하고 성화되어 가는 삶을 살아가는 유다의 삶이 참된 성도의 모범을 보여준다.
“그는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며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6-8).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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