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종
여기에 간단한 시험문제가 있다. 이 문제는 우스워 보이지만 결코 웃어 넘길 수만은 없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문제: 아버지가 심부름을 시켰습니다. 이 심부름을 꼭해야만 합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지혜로울까요? 알아 맞혀 보세요.
1. 말로 할 때 한다.
2. 조금 얻어맞고 한다.
3. 많이 얻어맞고 한다.
4. 끝내 버티다가 쫓겨난다.
당신은 과연 몇 번에 동그라미를 치겠는가? 그리고 실제로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 두 말할 필요 없이 1번형 인간이 가장 지혜롭다는 데에 의의가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번대로 살아가지 않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4번형 인간이야 도무지 소망이 없는 존재이지만, 뜻밖에도 3번형 인간이 많다는 사실은 우리가 한번 그 원인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하기야 교회에 초청되어 신앙간증을 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실컷 두들겨 맞고 절뚝거리며 주님께 나온 사람들 얘기뿐이니 한국성도들이 그런 식의 삶을 정상적으로 여기는 비정상에 빠진 경향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우리는 스스로 지혜롭다고 하고 눈치가 빤하면서도 미련하게 굴다가 얻어맞는 어린아이들처럼 하나님의 낯빛을 분명히 느끼면서도 끝내 버티다가 혼찌검이 나서야 두손들고 엎어지는 그 미련함의 원인이 무엇일까? 1년을 걸려도 한번 제대로 읽지 못하는 방대한 양의 하나님 말씀을 통해 하고 또 하시는 아버지의 음성은 도대체 어느 귀로 듣고 어느 귀로 흘리는 지 모를 일이다. 가슴 한 복판에 주님을 모시고 그 음성 듣기를 즐거워하여 주님의 부드러운 숨결에 실려 춤추는 난초 잎사귀처럼 사는 것이 정말 이토록 힘든 일일까? 이 모든 소치가 다 ‘나’있고 ‘예수’있다는 식의 교만한 사고 구조 탓이 아닌가 싶다.
입술로는 화려하게 그 영광을 말하지만 가슴엔 여전히 내가 왕으로 남아 거룩한 통치권을 향해 빨치산처럼 출몰하는 교만을 버리지 못한 탓이다. 어쩌다가 짜놓은 행주처럼 후줄근한 영혼을 만나게 되면 그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은혜가 된다. 뼈가 없는 연체동물처럼 부드럽고 온유한 신앙인에게서 오히려 압도당하는 힘을 느끼게 된다. 바로 사지 선다의 4번에서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 1번의 모양으로 살 순종하며 사는 사람들이다. 물론 순종에도 노예의 순종이 있고 자녀의 순종이 있다. 품삯을 바라는 파출부의 수고와는 다른 사랑에 겨운 새색시의 수고로 주님을 섬길 때, 이것이야말로 주님이 받으실만한 향기가 될 것이다.
지금도 주님의 음성은 꽃잎 위에 내리는 햇살처럼 내게도 다가온다. 한국말로는 번역하기 어려운 부드러운 터치(Touch)로 다가오는 주님의 사랑, 그것을 잘 감당하지 못하는 불감증만으로 우리는 이미 죄인이다. 야구 방망이로 두들기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겠지만 주님의 마음이야 어디 그런 식으로 자녀들을 대하고 싶으실까? 그 세미한 간섭을 느끼지 못하는 세 가지 원인은 있다. 하나는 죽었을 때, 두 번째는 잠들었을 때, 마지막으로 엉뚱한데 정신을 팔고 있을 때이다.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서 우리에게 세미한 음성으로 다가오신다. 우리는 ‘말로 하실 때’ 주님께 응답하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