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이 주는 힘
어제 28일은 중복이었다. 집 가까이 있는 삼계탕 집은 오늘도 북새통 이었다. 서양에서는 가장 더운 날을 Dog Day라고 하는데 큰개자리라고 불리는 별이 한여름이면 태양에 가장 가깝게 접근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재밌게도 그 Dog Day, 바다가 끌어 오르고, 포도주가 상하고, 사람이 늘어지고, 열 받고, 신경질 나고, 개들이 미칠 정도로 더운 그 날에 우리나라 사람들은 개를 잡아먹는다.
우리가 복날에 삼계탕이나 보신탕을 먹는 것처럼 다른 나라 사람들도 보양식을 먹는다. 일본은 장어요리를 먹는다고 하는데, 스태미너에 좋다고 한다. 중국에서는 잉어부레, 사슴힘줄, 동충하초, 상어지느러미, 해삼, 전복 등을 넣어 만든 불도장이나 거북탕 먹고, 프랑스는 포터 퍼(소고기와 채소를 넣어 만든 수프), 영국은 캐서롤(사슴고기), 베트남은 13가지 약재와 양고기로 만든 라우제, 태국은 톰양꿍(고수라는 향채 넣은 국물), 필리핀은 발릇(오리알(부화직전)), 그리고 이탈리아는 굴을 먹는다.
물론 우리는 이 더운 여름에 우리의 몸을 위하여 이렇게 보양식을 먹지만, 아무리 좋은 음식이라도 마음이 병들어 있으면 그까지 거 산해진미, 진수성찬이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오히려 좋은 음식 보다는 좋은 마음의 상태가 우리들의 건강에 더 큰 영향을 주는 것을 경험한다. 담임목사라면 이런 경험이 다 있을 것이다. 새신자 한명 교회에 오면 밥 먹지 않아도 배부른 적이 있는…… 보양식 먹지 않아도 마음에 기쁨이 있으면 힘이 난다. 마음에 기쁨이 있으면 삶의 활력이 솟는다. 그것은 다 경험을 통해서 아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인생에는 기쁨은 꼭 있어야 한다.
기쁨은 삶의 힘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웃고 사는 것에는 늘 현실적인 문제들이 따른다. 웃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기쁘지 않기를 바라는 인생이 누가 있는가? 다 행복한 웃음 속에서 살고 싶어 한다. 그런데 문제는 인생을 둘러싼 환경들이 기뻐할 수 없게 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성경은 어떤 상황에서도 기뻐하라고 한다. 그것은 우리가 당하는 상황을 기쁘게 여기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기쁘게 여길 수 있는 즐거운 상황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것은 명령이다. 상황을 뛰어넘어 기뻐하라는 것이다. 하박국 선지자는 하박국서 3장에서 다른 나라들이 이스라엘을 쳐들어올 것에 대한 공포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인하여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내 뼈에 썩이는 것이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16절) 얼마나 공포스러웠으면 그렇게 표현했겠는가? 한마디로 죽겠다는 것이다. 과연 이렇게 공포스러운 상황에서도 기뻐해야 하는 것인가? 그러나 하박국의 답변은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17~18절) 생긴 구조로 볼 때는 항상 기뻐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의 구조다. 항상 기뻐한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말도 안 되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항상 기뻐해야 하는 것일까?
하박국은 다음 구절에서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19절) 우리가 기뻐해야 할 이유는 하나님이 힘이 되시기 때문이다. 그 힘은 나의 기뻐할 수 없는 모든 상황들을 기뻐할 수 있는 상황으로 바꾸어 놓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뻐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항상 기뻐해야 하는 것이다. 하박국은 기도 가운데에서 자신에게 진정으로 힘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발견했다. 그것은 하나님만이 자신의 힘이 된다는 사실이었다. 참된 기도의 사람은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 힘을 얻을 수 있다. 영적인 삶에서 기도는 우리의 생명을 유지하는데 필수이다. 하박국이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응답하시고 하박국은 그 응답을 체험하며 기뻐할 수 있었다. – 추하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