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전쟁
가족을 데리고 청도를 몇 번 지나갈 때마다 소싸움 경기장을 봤다. 소싸움을 가까이서 본 적이 없어서 궁금하기는 했지만 그곳에 들어가 보지는 않았다. 동물이 싸우는 것을 본다는 것이 잔인해 보였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동물보호법에 따라 개싸움, 닭싸움, 말싸움은 불법이지만 소싸움은 전통놀이로 합법적이다. 처음에 소싸움은 소를 키우는 사람들 사이에서 즉흥적인 놀이로 시작됐지만 차차 그 규모가 커져서 부락이 명예를 걸고, 자기들의 힘을 과시하는 방도가 된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명예와 힘을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돈 벌이의 수단이 되었다. ‘한국우사회’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보니까 일주일에 판매되는 우권의 매출이 5억이다. 일 년이면 300억이다. 소싸움이 존재하는 한 그 매출이 늘어나면 늘어나지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
소싸움에는 반드시 피를 보게 되어있다. 그래서 그런지 사람들이 흥분을 한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우리나라 소싸움 없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나도 소싸움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한 사람이며, 더 나아가 이 세상의 싸움이라는 싸움은 모조리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쉽지 않다는 걸 안다.
싸움은 무엇인가? 치고 박고, 말로 욕으로 하는 것만 싸움일까? 아니다. 사회학적으로 보면 협력과 반대되는 모든 것이 다 싸움이다. 그것이 물리적이건, 정신적이건, 정치적이건, 개인적이건, 크건, 작건, 남이 알건 모르건 간에 우리는 모두가 싸움에 노출되어 있다.
엊그제 집에 늦게 들어와 보니까 테이블에 리모컨 두 개가 놓여있었다. ‘아들 두 놈이 또 TV로 윳놀이를 했구나, 또 게임을 하면서 싸웠겠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명절 때 마다 TV에서 보여주는 장사 씨름대회, 스포츠, 심지어는 예능에 나온 팀의 대결구도, 승자와 패자를 갈라내는 모든 프로그램들, 엄밀히 말하면 다 싸움이다. 싸우는 프로그램이라 더 재미있고, 손에 땀이 나게 하고, 결과가 궁금한 것이다. 학생들의 휴대폰을 들여다보면. 설치되어 있는 게임이 어떠한 것인가? 다 싸우는 것이다.
그러면 왜 우리는 싸움을 좋아하는 것인가? 말로는 평화를 좋아 한다고 하지만 우리 속 깊은 곳에 내재 되어 있는 그 무엇이 우리를 싸우게 하고 있다. ‘평화 교육학’에서는 인간 사회의 모든 악의 근원이 인간의 공격성 때문이라 말한다. 공격성이라는 정신적인 특성은 인간이 죄를 지은 이후에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성경에서도 인간이 죄를 범하고 악해져서 공격적으로 변한 것을 볼 수 있다. 창세기 3:11-12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 그렇게 물으시자 아담은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라며 공격적인 대답을 한다. 하나님께서 물으신 것은 ‘네가 먹었냐 안먹었냐?’였지 왜 그것을 먹었느냐?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네, 아니오라고 대답해야 할 것을,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하게 하신 그 여자가 주었다”라면서 죄에 대한 책임을 하나님 또는 여자에게 전가하고 있다. 이건 아주 공격적인 태도이다. 만약에 그때 아담이 아무 소리 안하고 ‘네 제가 먹었습니다. 잘못했습니다’라고 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아마도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셨을 것이다.
하나님은 다 알고 계셨다. 다만 사람에게 물으신 것은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할 기회를 주신 것이다. 그러나 남자나 여자나 할 것 없이 그 책임을 남에게 전가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벌을 내리신 것이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은 이런 공격성을 가지게 된 사람들을 걱정하시면서 명령을 내리셨다. 그것은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한 말씀이다. 창세기 3장 16절 하반절을 보면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이것은 관계의 질서를 말씀한 것이다. 아내는 남편을 사랑하고 복종하고, 남편은 아내를 책임져라. 이것이 싸우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방법, 이것이 사회의 기준이고 원리이다. 죄와 저주 때문에 남자와 여자가 서로 싸우게 되었다. 인간의 공격성으로 관계의 문제가 생길 것이 뻔했다. 사람이 더 늘어나서 더 큰 사회가 될수록 다툼은 더 발생한다. 그러기 때문에 기준이 필요하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신 기준이 바로 권위에 대한 복종이다. 사람끼리 싸우지 말라. ‘사람은 싸움의 대상이 아니다. 사랑해야 할 대상이며, 복종해야 하고, 책임져야 할 대상이다’라는 것이다.
로마서 13:1-3에서도 그것을 말씀하고 있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다스리는 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권위를 인정하고 복종하면 싸우지 않게 된다는 말씀이다.
그러나 싸움의 대상에 대해서 한 가지 허락하신 것이 있다. 아니 허락이 아니라, 명령이다. 창 3장 15절 말씀에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사탄과 여자가 원수가 되었다. 그리고 사탄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 즉 그리스도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이 원수가 될 것이라고 한다. 원수가 될 것이라는 말은 원수가 되어야 한다는 말과 같다. 원수가 무엇인가? 원수는 적의, 증오, 적대적인 행동을 취하는 자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는 우리의 원수 사탄을 평생 대적해야 하는 것이다.
싸우는 것, 피곤하고, 힘들고, 괴로울 것 같아도 어쩔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성도의 삶이기 때문이다. 예수님 믿은 것, 결코 고상 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우리를 가리켜 ‘군사’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바울 서신을 보면, ‘군사’라는 말과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하면서 싸움에 해당하는 말을 많이 하고 있다. 믿는 자의 신분은 그리스도의 군사이다. 그러면 군사가 해야 될 가장 중요한 일이 뭘까? 전쟁터에 나가 싸우는 것이다. 성경에서는 ‘네가 군사가 될 것이다’라고 한 것이 아니라 이미 군사라고 했다. 이미 전쟁은 오래 전부터 시작되었고, 전쟁은 진행되고 있으며, 우리는 그 전쟁에 투입된 군사이다. 그리고 우리가 분명히 아는 것은 적과 싸워야 하고 싸움을 승리로 이끄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