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확신이 있습니까?

(침례 자체에 죄를 씻어내는 힘이 있지는 않습니다.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응답하면서 자신의 구원을 공개적으로 알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구원받고 확신한 사람만이 침례를 받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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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R. 라이스(John R.) (20세기 가장 강력한 펜(pen)
모든 그리스도인은 아기 그리스도인으로 출발합니다. 하지만 항상 아기로 지낼 수는 없습니다. 구원받은 받은 후에는 은혜 가운데 자라가야 합니다. 좋은 예가 사도행전에 있습니다.
“그의 말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세례를 받았다. 이렇게 해서, 그 날 신도의 수가 약 삼천 명이나 늘어났다.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에 몰두하며, 서로 사귀는 일과 함께 음식을 먹는 일과 기도에 힘썼다.…… 그리고 날마다 한 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집마다 빵을 떼면서, 순수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사람에게서 호감을 샀다. 주께서는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여 주셨다. “ (행 2:41-42,46-47;)
오순절 날 3000명이 구원 받았습니다. 그리고 은혜롭게 성장했습니다. 그들은 정말로 행복했고 또한 풍성하게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 행복의 첫걸음은 어디서 시작되었습니까? “그의 말을 기쁘게 받아들인 사람들이 침례를” 받으면서 시작되었습니다.
누가 침례를 받았습니까? 누가 공개적으로 그리스도인이라 불리기를 자청했습니까?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기쁘게 받아들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날의 광경을 상상해보십시오. 사람들이 말합니다. “베드로 선생님, 저 구원받았습니다. 주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예수님께서 여러분의 죄를 대신해서 죽으신 것을 믿습니까? 여러분의 죄 값을 대신 값아 주신 것을 믿습니까? 그분을 믿으면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는 약속을 믿습니까?”
“네, 분명하게 믿습니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침례를 받으십시오.”
침례 자체에 죄를 씻어내는 힘이 있지는 않습니다.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응답하면서 자신의 구원을 공개적으로 알리는 것입니다. (벧전 3:21-그것은 지금 여러분을 구원하는 세례를 미리 보여 준 것입니다. 세례는 육체의 더러움을 씻어 내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힘입어 선한 양심을 가지려고, 하나님께 드리는 호소입니다.) 따라서 구원받고 확신한 사람만이 침례를 받을 수 있습니다. (막 16:16-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함을 받을 것이다; 행 8:12, 37-그런데 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알리는 복음을 전하니, 남자나 여자나 다 그의 말을 믿고 세례를 받았다. “37. 빌립이 말하였다. ‘그대가 마음을 다하여 믿으면, 세례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 때에 내시가 대답하였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습니다.'”)
그날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기쁘게 받아들인 사람들은 구원을 받았고 또한 구원 받은 것을 확신했습니다. 그것이 행복과 은혜로운 성장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들은 흔들리지 않았고 한마음이 되었고 하나님을 찬양했고 온 백성에게 호감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구원의 확신이 없었다면 성장도 열매도 없었을 것입니다.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불확실하다면, 어떻게 성경의 약속을 믿고 살아가겠습니까? 어떻게 확신 있게 기도하겠습니까? 자신도 확신하지 못한 것을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전하겠습니까?
구원의 확신은 영적인 성장의 첫걸음입니다.
우리는 구원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인도하는 기도회에서 어떤 여자분이 말했습니다. “목사님, 제 이웃 사람이 자기는 자신이 구원받은 것을 알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 말은 너무 주제넘은 것 아닐까요?
그분은 아주 현명한 답을 주었습니다. “아닙니다. 만약 그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신뢰한다면, 자신이 구원받은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다.”
정말 자신이 구원받은 것을 알 수 있을까요? 천국에 간다는 것을 알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디모데후서 1장 12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나는 이런 고난을 당하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나는 내가 믿는 분을 잘 알고 있고, 또 내가 맡은 것을(또는 ‘내가 그분에게 맡긴 것을’) 그분이 그 날까지 지켜 주실 수 있음을 확신합니다.”
“내가 믿어온 분을 내가 안다”는 것은 이미 이루어진 일입니다. 이미 믿어 왔습니다. “내가 지금 믿고 있는 중이다”가 아닙니다. 또한 바울은 믿음에서 나오는 행위로서 이미 자기 자신을 그리스도께 맡겼습니다. 영혼의 구원을 맡겼습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능히 지쳐주실 것을 확신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구원받은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에서도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누가 감히 그들을 정죄하겠습니까? 그리스도 예수는 죽으셨을 뿐 아니라, 오히려 다시 살아나셔서 하나님의 오른편에 계시며, 우리를 위하여 대신 간구하여 주십니다.” (롬 8:34)
그에게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편이라는 확신이 있습니다. ‘이미’, ‘분명히’ 구원받았다는 확신이 있습니다. 로마서 8장의 마지막 부분을 더 읽어보겠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곤고입니까, 핍박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협입니까, 또는 칼입니까? 성경에 기록된 바 “우리는 종일 주님을 위하여 죽임을 당합니다. 우리는 도살당할 양과 같이 여김을 받았습니다” 한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모든 일에서 우리를 사랑하여 주신 그분을 힘입어서, 이기고도 남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들도, 권세자들도, 현재 일도, 장래 일도, 능력도, 높음도, 깊음도, 그 밖에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롬 8:35-39)
성경 말씀으로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바울처럼 우리도 구원 받은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을까요? 요한일서 5:11-13을 보겠습니다.
“또 그 증거는 이것이니 곧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것이라.”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우리가 돈 주고 산 것이 아닙니다.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단순한 생명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성경은 계속해서 말합니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들을 [성경에] 쓴 것은 너희에게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너희로 하여금 알게 하고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게 하려 함이라.” (요일 5:12-13)
이 말씀이 기록된 이유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입니다.
구원받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성경 말씀으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내 죄 값은 모두 치러졌습니다. 그분을 믿으면 내 죄는 사라지고 더 이상 나를 붙들지 못할 것입니다.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존하는 생명이 있으며” (요 3:36).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의 말을 듣고 또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사람은 영생을 얻고, 심판을(또는 ‘정죄’) 받지 않는다. 그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 갔다.” (요한복음 5:24)
믿는 사람은 이미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언젠가 가지게 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 쓰여졌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았다면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구원받고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왜 많은 사람들이 잘 모르는 걸까요? 구원을 받았다고 해서 구원의 확신이 항상 곧바로 따라 오는 것은 아닙니다. 처음의 감격이 서서히 잦아들면서 회의가 싹트는 경우도 있습니다. 처음부터 어떻게 확신을 가져야 하는지 모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나는 구원받고서도 3년 동안 확신하지 못했습니다. 9살 무렵이었습니다. 고향에 있던 교회에서 어느 목사님이 돌아온 탕자에 대해서 설교했습니다. 자신의 간증도 했습니다. 그는 어릴 때 집을 뛰쳐나와 인쇄소에 일자리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모든 글자와 구두점을 일일이 손으로 작업해 넣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만 잘못해서 활자판을 몽땅 엎어뜨리는 바람에 일을 망치고 말았습니다. 결국 월급도 못 받고 쫓겨났습니다. 그는 배가 고프고 외로워서 집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아버지는 그를 사랑해서 용서했습니다. 도망쳤던 아들을 다시 받아주었습니다.
목사님이 마지막에 말했습니다. “방탕한 아들이 아버지를 만나러 집에 왔을 때, 아버지는 아들을 보려고 달려 나왔습니다. 그를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이처럼 지금 여러분이 그리스도께 나온다면 그분께서 받아주실 것입니다.”
구원의 초청을 받았을 때 나는 가운데 통로를 따라 걸어 나가서 목사님에게 말했습니다. “좋아요. 예수님을 믿기 위해 나왔어요.”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때 성경을 펼쳐서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셨는지 보여준 사람이 없었습니다. 내가 너무 어리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단지 이렇게 말했을 뿐입니다. “존, 그렇다면 이제 침례를 받고 교회 회원이 되면 된단다.”
그날 집에서 와서 말했습니다. “아빠, 내가 교회 회원이 되는 거 어때요?” (나는 내게 일어났던 일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아빠는 “글쎄다, 네가 죄를 회개하고 거듭날 만큼 충분히 나이가 들면 그때 교회에 가입해도 늦지 않을 거다.”
나는 그런 거창한 말들이 무슨 뜻인지 몰랐습니다. 하지만 아빠가 내가 구원받지 못했다고 생각한다면 그게 맞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때는 아빠가 세상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슬프게도 구원의 문제를 옆으로 제쳐 놓았습니다. 나는 너무 어리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빠의 말을 더 의지했습니다.
다음날 아침 학교 가는 길에 버드나무 아래 모래사장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주님, 저는 아무래도 구원받기에는 너무 어린 것 같습니다.” 그리고는 이 사람 저 사람을 언급했습니다. “주님, 그들은 어리지 않습니다.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주님, 그들을 구원해주세요.”
자기 구원은 확신하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의 구원을 걱정했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어떻든 그런 이상한 상황은 계속되었습니다. 그날 열두 살짜리 소년이 집회에 왔는데 울고 있었습니다. 나는 내가 구원받았다면 더 울어야 되는 게 아닌지 궁금했습니다. 나는 어떻게 구원을 확신할 수 있는지 몰랐습니다.
그렇게 의심 속에서 몇 년을 지냈습니다. 어떤 목사님에게 기도해달라고 요청한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 지 알려달라”는 말은 할 줄 몰랐습니다. 내 생각에는 그도 뭐라고 말해줘야 되는지 몰랐던 것 같습니다. 그가 말해준 것은 “너를 위해서 기도할 테니 너도 자신을 위해서 기도하거라”가 전부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날 밤 집에 가서 침대 옆에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하지만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잠자리에 들어도 여전히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에 다시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교회에 가입하고 그리스도를 위해 최선을 다해서 살자고 다짐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성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요한복음을 보니 놀라운 약속들이 있었습니다.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존하는 생명이 있으며” (요 3:36).
“그를 믿는 자는 정죄를 받지 않지 아니하거니와” (요 3:18)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자신의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것은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영존하는 생명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그분을 영접한 자 곧 그분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권능을 주셨으니”(요 1:12)
나는 말했습니다. “그래 바로 이거야. 내가 진심으로 예수님을 믿고 신뢰했다면 나는 이미 영원한 생명을 얻은 거야. 이게 성경의 약속이야.” 그리고 내 기억으로 그때 이후로는 구원에 대해서 한번도 의심한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증인이십니다.
선한 행위에 의지하기 때문에 의심이 생깁니다
성경에 약속이 있는데도 사람들은 왜 구원을 의심하는 걸까요? 엉뚱한 곳에서 확신을 찾기 때문입니다. 우선 자신의 생활과 행위를 근거로 확신을 가지려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구원 받을 자격이 없는 사악한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기 싫어합니다. 다들 자신이 꽤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느 복음 전도자가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매일 한 사람 이상을 주님께 인도한다는 원칙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 밤 10시가 되었는데도 아직 한 사람도 구원시키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시내에 나갔고 아직 문이 열린 가게를 발견했습니다. 사람들이 계산대에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 중에 머리가 긴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이 친구에 걸어가서 말했습니다.
“지금 바로 죽는다면 천국에 갈 수 있니?”
“천국에 갈 거라고 생각해요”
전도자는 “왜 그렇게 생각하지?”라고 말했습니다.
“글쎄요, 나는 아주 착한 사람이니까요.”
전도자가 말했습니다. (약간은 심한 말이었지만 말입니다.) “그렇지 않아. 너는 곧장 지옥으로 가게 될 거야.”
그러자 이 친구가 화나가서 말했습니다. “누가 그러는데요?”
전도자가 대답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어. 여기 요한복음 3장을 봐. 그분은 네가 반드시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셔. 거듭나지 않으면 결코 그 왕국을 볼 수 없어.”
그 소년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계산을 기다리는 줄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주님을 믿고 구원받았습니다. 그 동안 다른 사람들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주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지옥에 가야만 하는 죄인이라고 인정하기 싫어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일부라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옛날 찬송가 하나를 보겠습니다.
예수님이 모두 갚아주셨네.
나는 그분께 모두 빚지고 있네.
죄는 시뻘건 얼룩을 남겼으나
그분이 눈처럼 하얗게 씻어주셨네.
하지만 육신적인 옛 본성은 이렇게 바꾸고 싶어합니다.
예수님이 일부를 갚아주셨네.
그리고 일부는 내가 갚았네.
죄가 얼룩을 조금 남겼으나
우리가 눈처럼 하얗게 씻었다네.
모두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우리가 자격이 있어서 구원을 받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받습니다.
“이는 너희가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이니 이것이 너희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것은 아무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엡 2:8)
여러분의 힘으로 구원받으려고, 여러분의 힘으로 구원을 유지하려고 애쓰기 때문에, 불안하고 확신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노력하면 할수록 자신이 자격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실망할 뿐입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감정에 의존하기 때문에 의심이 생깁니다
확신을 못 가지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감정이나 기분에 의존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떤 잘못을 하면 양심에 찔려서 마음이 상합니다. 그러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아무래도 나는 구원받지 못한 것 같아. 예전에는 열정도 있고 확신도 있었는데 이제는 아니야.’
때로는 건강 때문에 낙심하기도 합니다. 어떤 부인이 생각납니다. 그녀는 여러 가지 생활의 변화 때문에 혼란스럽고 예민했습니다. 감정적으로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건강 악화와 신경 과민이 문제였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너무 혼란스러운 나머지 자신이 구원받지 못했다고 생각하는데 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구원받은 적이 전혀 없거나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지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여러분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어쩌면 몸이 안 좋아서 마음까지 우울해졌을지도 모릅니다. 어떤 일이 안 풀리거나 실패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죄를 지어서 양심에 찔렸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답답하고 의기소침하고 마치 구원이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느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어떻든 우리는 감정으로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더 울고 더 감격한다고 더 큰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 그분의 선물입니다. 우리 감정은 변하지만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십니다.
확신을 얻고 싶다면 감정의 소용돌이가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 보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대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 임이라.” (롬 10:13)
여러분의 영혼이 안심할 만큼 기쁘고 든든한 말씀 아닙니까? 용서를 받고 구원을 받는데 여러분이 할 일은 없습니다. 단지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 나와서 간구하기만 하면 됩니다. 진심으로 주님을 부른다면 그 즉시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은행에 돈을 예금하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립니까? 여러분이 예수님께 나와서 구원받는 데는 그 정도의 시간도 필요 없습니다.
구원에 있어서는 여러분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믿으십시오.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분으로 만들지 마십시오. (요일 5:10)
어떤 젊은이가 무디(D. L. Moody)와 만났습니다. 그는 이미 회심은 했지만 아직 구원의 확신이 없었습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내게는 충분한 믿음이 없는 것 같습니다.”
무디가 말했습니다. “누구에 대한 믿음이 없다는 거죠? 예수 그리스도를 의심하나요?”
“아뇨, 절대 아닙니다. 내 자신을 의심할 뿐입니다.”
“구원은 당신이 하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을 의심하는 게 아니라면 그분께 맡기세요.”
이것이 유일한 길입니다. 예수님께서 구원하십니다. 값없이 해주십니다. 여러분은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을 위해서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구원의 확신은 이렇게 말할 때만 옵니다.
“나는 예수님만 의지한다. 그분은 약속대로 날 붙잡아 주실 것이고 절대로 떠나지 않으실 것이다. 내게는 약속대로 영원한 생명이 있다.”
구원도 확신도 그분께 맡기십시오.
“그 아들을 모신 사람은 생명을 가진 사람이고, 하나님의 아들을 모시지 않은 사람은 생명을 가지지 못한 사람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여러분에게 이 글을 씁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요일 5:12-13)
나처럼 여러분도 구원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까? 단순히 어떤 사실을 믿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신뢰합니까? 만약 그렇다면 여러분에게는 이미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결코 사라지지 않을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만약 아직 구원받지 못했다면 지금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시며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셨습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고 전적으로 예수님만 의지하십시오. 그러면 영원토록 안전한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제 모든 의심을 던져 버리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께 맡기십시오. 오직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확신을 찾으십시오. 그러면 오순절 날 3000명이 지나갔던 그 행복의 계단을 여러분도 한걸음씩 올라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글은 존 R 라이스의 ‘구원의 확신(Assurance of Salvation)’을 기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원저자의 글에 어떤 전제를 가지고 건너뛰거나 다소 압축적인 부분들이 있어서 번역자가 원저자의 다른 저작을 참고하고 행간의 의미를 덧붙여 편역했습니다.